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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S 2023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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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첫 해외출장 회고

CES 2023은 내 첫 해외 출장이었다.

처음이라 준비하는 것부터 일이었다. 여행사, 비자, 해외 유심, 로밍, 경유지까지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것들을 하나씩 직접 챙겨야 했다.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는 시차 적응 때문에 이틀 정도를 거의 정신없이 보냈다.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았고 물가도 생각보다 훨씬 비쌌다. 돌솥비빔밥과 김치찌개를 먹고 8만 원 가까이 나온 걸 보고 미국 물가를 제대로 체감했다.

처음에는 모든 게 낯설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 CES 현장에 들어가면서 출장 전 느꼈던 긴장보다 훨씬 큰 자극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 시장에 나가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CES에 와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세상이 정말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뉴스나 인터넷으로 기술 트렌드를 보는 것과 전 세계 기업들이 한 공간에 모여 직접 제품을 보여주는 것을 보는 건 완전히 달랐다. 어떤 기술에 사람들이 몰리는지, 기업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지, 제품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는지를 현장에서 바로 볼 수 있었다.

기억에 나는건 LG의 새로운 무선 OLED 스크린, 레노버의 듀얼 스크린 노트북, 소니와 혼다가 함께 만든 전기차 AFEELA처럼 기존 제품의 형태를 다시 정의하려는 시도들이 많이 보였다. 자동차, 디스플레이, 노트북처럼 이미 익숙한 제품들도 소프트웨어와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만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뉴스로 볼 때는 그냥 신기한 신제품 정도였는데, 현장에서 한꺼번에 마주하니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게 느껴졌다.

한국 기업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스타트업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었는데, 현장에서 제품들을 보고 있으니 한국의 기술력과 실행력이 생각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우리 제품도 한국 안에서만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라면 만나기 어려운 해외 고객과 바이어들이 직접 부스를 찾아와 제품을 보고 질문했다. 명함도 교환했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시장에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브라질 진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CES에서 실제 브라질 바이어 한 명이 우리 제품에 관심을 가지고 명함을 주고 갔다.

당장 계약이 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꽤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막연하게 생각하던 해외 진출이라는 것이 갑자기 현실적인 일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시장에 나가 있으면 기회가 생긴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어도 우리가 방 안에 앉아 있으면 세상은 우리를 알지 못한다. CES를 통해 처음으로 그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만드는 제품의 의미를 고객에게 배우다

부스를 찾아온 사람 중 한 명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갔다

“당신은 디자인 작업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기업을 만들고 있습니다.”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미션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품을 만들고 회사를 운영하는 데 정신이 팔려 그 말을 잊고 있었다.

기능을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고, 매출을 고민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가’보다 ‘이번에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가’만 생각하게 된다.

그 말을 고객에게 직접 듣고 나니 우리가 만드는 제품을 기능의 집합으로만 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객에게 중요한 건 기능이 몇 개 있는지가 아니다.

이 제품을 사용했을 때 자신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어떤 경험을 주었는지가 중요하다.

그 이후부터 제품을 설명할 때도 단순히 “이런 기능이 있습니다”가 아니라 “ 우리 제품은 당신의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고 있어요”라는 관점으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CES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제품 관점 중 하나였다.

가장 큰 영감은 사람에게서 온다

CES에는 정말 혁신적인 제품도 많았고 공간 구성도 꽤 나한테 큰 영감을 줬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런 것들보단 사람들이 더 많이 기억에 남았다.

그중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은 사람이 우리 부스 통역을 맡았던 애니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대학생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17살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나이를 속이고 통역사에 지원했다고 했다.

그 사실 자체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일을 하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부스 앞에 오면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앉아 있다가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흥미 있으면 이쪽으로 와서 한번 봐.”

17살의 학생이 아니라 20년 경력의 세일즈맨을 보는 것 같았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제품을 이해하는 속도였다.

회사 소개서를 한 번 보고 제품을 잠깐 사용해본 뒤 바로 고객들에게 제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설명하기 어려워하던 부분까지 더 쉽게 설명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이는 정말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실제 환경에서 계속 사용해본 사람은 나이와 관계없이 강하다.

애니는 법학을 공부하면서 비즈니스 수업도 듣고 있다고 했다. 미국 학생들은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학 등록금도 직접 벌어서 내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한국 학생들이 왜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에도 부모님 돈을 받아 쓰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나는 17살 때 내 강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나.

그 강점을 가지고 어떤 인생을 만들지 생각해본 적이 있었나.

아마 없었던 것 같다.

애니를 보면서 중요한 건 빨리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빨리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환경에서 강점을 발휘하는지를 빨리 발견할수록 그만큼 인생에서 더 많은 시도를 해볼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17살 중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좋은 세일즈는 제품 설명이 아니라 상대방의 문제를 찾아주는 것

또 한 명 기억에 남는 사람은 서동메디칼 대표님이었다.

대표님이 만든 ‘누리아이’라는 제품을 CES에 가져왔는데, 현장에서 엄청난 판매력을 보여주셨다. 지금까지 제품을 30만 대 정도 판매했다고 들었는데 직접 옆에서 보니 왜 그렇게 많이 팔았는지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제품의 기능을 열심히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을 먼저 봤다.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어, 눈에 다크서클 많이 내려오려고 하네. 이거 딱 네 번만 끼면 피로 싹 없어진다.”

제품 이야기보다 먼저 내가 이 제품을 사야 할 이유를 만들어버렸다.

그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보통 제품을 파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제품이 얼마나 좋은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데 고객은 제품이 좋은지보다 자신에게 왜 필요한지를 먼저 생각한다.

결국 세일즈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말하고 싶은 제품의 장점이 아니라 상대방이 지금 가지고 있는 문제를 얼마나 정확하게 발견하느냐는 것이었다.

우리 제품을 판매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제품에는 이런 기능이 있습니다”보다 “당신이 지금 이 작업 때문에 매번 두 시간을 쓰고 있는데, 이걸 20분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라는 설명이 훨씬 강하다. 결국 중요한 건 제품을 얼마나 잘 설명하느냐가 아니라, 고객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문제와 제품을 연결해주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내가 개발자로서도 꽤 크게 와닿았다. 개발을 하다 보면 새로운 기능을 만들고 기술적으로 더 나은 방법을 찾는 데 집중하게 되는데, 결국 그 기능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지를 놓치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좋은 개발자는 코드를 잘 짜는 사람보다, 사용자가 겪고 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사람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야를 넓히다

CES에 가기 전에는 박람회를 제품을 전시하고 바이어를 만나는 곳 정도로 생각했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전시회의 가장 큰 가치는 내 기준을 강제로 바깥으로 확장시켜 준다는 데 있었다.

전 세계 기업들의 제품을 보고, 해외 고객들의 반응을 듣고,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기존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기준들이 사실 굉장히 좁은 범위의 기준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특히 사업을 하면서 계속 회사 내부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이 비슷해진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능이 정말 중요한지, 우리가 생각하는 시장이 정말 존재하는지, 제품을 처음 보는 사람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CES에서는 그 답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어떤 설명에서 멈추는지, 어떤 부분에서 질문하는지, 어떤 기능에서 눈빛이 달라지는지가 바로 보였다.

그래서 앞으로도 제품을 만드는 것만큼 바깥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을 중요하게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소한 여행들

출장이었지만 라스베가스에서 경험한 순간들도 강하게 기억에 남는다.

카지노를 처음 해봤는데 첫 판부터 잭팟이 터졌다. 그 돈은 결국 부모님 선물을 사는 데 전부 썼다. 돈을 딴 것보다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기분 좋았다.

벨라지오 호텔 분수쇼도 잊기 어렵다.

살면서 본 광경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였다. 한 번 보고 끝내기 아쉬워 며칠 뒤 다시 찾아갔다. 사람들이 ‘가슴이 웅장해진다’고 표현하는 감정을 그때 처음 제대로 이해했다.

마지막 날에는 씨애이랩 대표님, 미나님과 레드락 캐년에 갔다.

레드락 캐년에는 비가 많이 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하필 우리가 간 날 비가 내렸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영화처럼 느껴져 처음에는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날 관광을 마치고 먹었던 스시까지 완벽했다. 음식을 먹고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맛있다고 느낀 경험은 몇 번 없는데 그날이 그랬다.

CES 이후 내가 가져가고 싶은 것

이번 경험을 통해 세 가지를 확실하게 배웠다.

첫 번째는 밖으로 나가야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다. 브라질 바이어를 만났던 것처럼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시장에 나가 있어야 그런 우연도 만들어진다.

두 번째는 내 제품보다 고객을 더 많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제품의 기능을 열심히 설명하는 것보다 고객이 가진 문제를 발견하고 제품이 그 사람의 삶이나 업무를 어떻게 바꾸는지 설명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세 번째는 사람을 통해 내 기준을 계속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17살 애니의 태도와 실행력, 서동메디칼 대표님의 세일즈 방식처럼 책이나 강의로 배웠다면 그냥 지나쳤을 내용도 실제 사람을 눈앞에서 보니 강하게 남았다.

그래서 이번 CES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를 하나만 고르라면 계약이나 명함의 개수는 아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사업가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기준이 조금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더 넓은 시장을 보고 싶어졌고, 제품이 아니라 고객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싶어졌고, 나이와 경력에 기대지 않고 어디서든 실력으로 증명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첫 해외 출장이라 출발 전에는 비자와 유심, 비행기 걱정만 가득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완전히 다른 고민을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지금 얼마나 넓은 세상을 보고 있는가.나는 내가 잘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그리고 우리가 만드는 제품은 사람들의 일하는 방식을 정말 바꾸고 있는가.